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폰 비스마르크 (문단 편집) === 외교 전략 === >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 > 오토 폰 비스마르크 보통 널리 알려져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재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쉽게 말해 그가 치렀던 덴마크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의 보불전쟁은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지 독일 제국의 정복 야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일화처럼 그는 전장에서 불구가 된 참전 용사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특히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발견된다. 당시 이 전쟁에 참전한 장남 헤르베르트가 무사한지 알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비스마르크는 직접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 들판에 널린 사상자들을 살피고 다니며 생사불명의 아들을 애간장이 타도록 찾았다. 그 곳에서 비스마르크는 잠자리를 찾아 헤메다가 발을 헛디뎌 오물구덩이에 빠지거나 급히 말을 몰던 중 낙마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끔찍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 유명한 연설도 '''국가의 대문제''', 즉 '''독일 통일'''을 두고 한 이야기지 일반적으로 "나 [[불도저]]요!" 한 것이 아니다. 당시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대독일주의]]를 주창하며 대를 이어 [[알프스]] 이북독일 연방에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오스트리아]], 커다란 중부유럽 통일국가를 이웃으로 두는 것을''' --나는 독일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독일이 여럿이었으면 좋겠다--[* [[먼나라 이웃나라]] 등의 영향으로 이 말을 [[샤를 드골]]이 한 것으로 흔히들 알고 있으나, 이 말은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한 것이다.] '''경계하는 [[프랑스]]를 어떻게 배제하느냐?"'''였는데, 이것이 외교적으로 해결될 전망은 없었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시절 발생한 전쟁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는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외교관]] 출신답게 유럽 내 많은 국가들에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프랑스를 굉장히 왕따 취급했다는 점이다. 보불전쟁 이후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의 제2제국을 선포하자 이를 본 프랑스인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여기에 후술할 빌헬름 2세의 실책까지 더해지면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의 명분이 더욱 강해졌으며 결국 진짜로 [[베르사유 조약|복수]]가 성사되어 버렸다.] 비스마르크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 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과 경제력, 그리고 실전에서의 증명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확보에 회의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재직 시절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얻었고 정작 이후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린 빌헬름 2세는 시원찮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충언을 마지막에라도 들었어야 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안 듣고 군함과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열강[* 특히 [[영국]].]의 어그로를 끌 만한 짓만 골라서 일으키더니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가 져서 자신의 왕좌와 [[서프로이센]] 및 [[포젠]], 엘자스-로트링겐, 북부 슐레스비히, 상슐레지엔, 벨기에 국경의 영토 일부를 잃었다. 이것은 또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발호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서 패배하는 바람에 독일은 남아 있던 [[동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대부분, [[브란덴부르크]] 중 노이마르크 지역인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을 영구히 [[폴란드]] 및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고, 남은 영토마저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40년 간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그는 [[빌헬름 2세]]가 외교 무대에서 과욕을 부리고 수 차례 무리수를 두는 것을 보면서 이런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했는지, 죽기 얼마 전 이런 말을 남겼다. > '''[[프리드리히 대왕]]'''이 죽고 20년 후 '''[[예나 전투]][*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치욕스럽게 참패한다.]가 있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1919년|내가 죽고 20년 후]]에도 [[베르사유 조약|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그가 사망하고 20년 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웃기게도 베르사유 조약 20년뒤에 '''2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